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문단 편집) === 전쟁 종결 ===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육군을 맡겨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게 했고, 자신은 해군을 이끌고 항구로 접근했다. 이때 카르타고 사절이 찾아와서 평화 협상을 재개하자고 요청하자, 스키피오는 투네트를 협상 장소로 지정했다. 다음 날, 스키피오는 [[시팍스]]의 아들로 사전에 자마 전투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가 한참 후에야 도착한 [[베르미나(누미디아)|베르미나]]의 누미디아군을 공격해 15,000명을 사살하고 12,000명을 생포했다. 베르미나는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 뒤 사막에 몸을 숨겼다.[* 베르미나는 기원전 200년 사절을 로마로 보내 사면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위원들을 보내 마시니사와 협의했다. 그 결과, 그는 누미디아 서부의 일부 지역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마시니사에 충성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집정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202년 집정관)|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원로원에 스키피오가 너무 많은 명성을 챙기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며 아프리카 방면 임페리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민회는 스키피오가 원정군을 계속 지휘하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티베리우스는 5단 노선(Quinquereme) 50척에 군대를 태워서 아프리카에 상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정을 준비했다. 그러다 함대가 출항하기 전, 한니발 바르카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카르타고가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 군공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출항해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거쳐 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두 번의 폭풍을 겪고 칼리아리에서 배 수리에 전념해야 했다. 스키피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임페리움을 잃기 전에 카르타고와의 평화 협약을 서둘러 체결하기로 하고 요구 조건을 비교적 온건하게 설정했다. >1.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의 모든 소유물을 유지하며 법을 유지할 수 있다. 로마 수비대는 아프리카에 주둔하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없다. >3. 삼단노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해군을 로마에 넘긴다. >4. 은화로 10,0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마시니사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넘긴다. >5. 종전의 협약 대로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의 지배권을 로마에 완전히 넘기고 다시는 이 지역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카르타고인들은 의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강경파는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한니발이 강경파 한 명을 연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린 뒤 이제 더는 승산이 없으니 평화 협약을 이대로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협약을 맺는 쪽으로 의견이 쏠렸다. 이리하여 협약이 성립된 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함대를 끌어내어 불태웠고, 4천 명의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카르타고로부터 넘겨받은 탈영병들 중 이탈리아인들을 참수하고 로마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레기움에서 육로를 통해 로마로 이동하면서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로마에 도착한 후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식]]을 사흘간 거행하고 아그노멘인 '아프리카누스(Africanus: 아프리카 정복자)'를 수여받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일각에서는 그를 '스키피오 대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